가톨릭 성인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11월 4일)

one_step 2021. 10. 25. 23:53

가롤로 보로메오(1538-1584) 주교는 이탈리아 북부 지방 아로나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비오 4 교황이 그의 외삼촌이다. 신심 깊은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일찍부터 학문 연마에 힘썼으며, 사제가 되어 훗날 밀라노의 대주교로 임명된 뒤에는 교회 개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제도적인 지원책을 마련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1584년에 선종한 그를 1610 바오로 5 교황이 시성하였다.

 

 

같은 이름 : 가롤루스까롤로까롤루스샤를샤를르찰스카롤로카롤루스

 

카롤루스 보로메오(Carolus Borromeo, 또는 가롤로) 1538 10 2 이탈리아 북부 마죠레 호수 근처의 아로나 ()에서 지베르토(Giberto Borromeo) 백작과 교황 비오 4(Pius IV) 여동생인 마르게리타(Margherita de Medici)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 봉사하고자 하는 열망이 커서 12 그라시니아노(San Gratiniano) 수도원에서 삭발례를 받았다. 밀라노로 가서 알치아티(Alciati)에게서 교육을 받았으며, 1552 파비아(Pavia) 대학교에 진학하여 1559년에 민법과 교회법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559
12 25 그의 외삼촌인 지안 안젤로 추기경이 비오 4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직을 계승하게 되었는데, 교황은 조카인 카롤루스 보로메오를 로마(Roma) 불러들였다. 1560 추기경으로 서임된 그가 가장 투철한 사명감으로 일했던 분야는 교황청 국무성 장관으로서의 직무였다. 특히 그는 트렌토(Trento) 공의회 3회기 동안 그의 외삼촌인 교황에게 가장 열성적이고 믿음직한 협력자이자 지원자였다. 카롤루스 보로메오는 공의회 운영의 훌륭한 지도자로서 임무를 수행했고, 마지막 회기에서 칙서들을 성문화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1562
그의 페데리고(Federigo) 세상을 떠났을 , 그는 보로메오 () 수장 직책을 거절하고 1563 7 17 사제 서품을 받고 성직자로서의 신분에 맞는 생활을 하려고 더욱 분발하였다. 그는 트렌토 공의회가 요청한 교리교육과 미사 전례 그리고 성무일도 작업 등을 두루 감독했으며,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도 높은 개혁을 단행하여 그가 대주교로서 교구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밀라노 교구를 모범적인 주교좌로 만드는 놀라운 성과를 얻었다.

  
또한 그는 개혁 운동의 하나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윤리와 생활 태도 개선을 위해 유익한 기준을 마련했으며, 성직자 교육을 위한 신학교 설립, 어린이들의 종교 교육을 위한 그리스도인 교리회 설립뿐만 아니라 자신의 교구 내에 거주하는 예수회를 격려하였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지원을 제도적으로 보완했고, 프랑스 두에(Douai) 영국계 대학을 지원하는 데도 호의적이었으며, 자신의 재임 기간에 11차례의 교구 시노드(Synod) 6번의 관구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사제직을 지망하는 후보자들을 위한 단체의 성격을 지닌 암브로시우스의 헌신회’(지금은 카롤루스의 헌신회) 설립했는데, 그들은 주로 설교 활동에 종사하면서 프로테스탄트의 침입을 저지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타락한 신자들을 다시 교회로 불러들이는 노력을 쏟아부었다.

   1567
그는 주교의 관할권에 대한 밀라노 의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사건의 발단은 그가 나쁜 생활에 물든 평신도 여러 명을 투옥한 것으로, 주교좌가 당국에 의해 심한 공격을 받게 되자 그는 그들을 모두 단죄하였다. 재차 그의 주교직이 산타 마리아 델라스카라의 시의원들로부터 도전을 받자, 교황은 그를 후원하고 시의회는 그들의 뜻을 고수함으로써 파문을 일으킨 일이 있었다. 그는 어느 자객의 공격으로 상처까지 입었다. 1576 페스트와 기근으로 주민들이 난리에 빠졌을 , 그는 동안 매일 3천여 명의 주민들에게 음식물을 제공하며 어려운 난국을 극복하는 크게 이바지했다. 시의회와 교회 관할권 사이의 분쟁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으나 카롤루스 보로메오는 그때마다 현명하게 대처하였다.

  
그는 영국 선교 길에 오르는 수많은 젊은 사제들을 접견하고 지원했으며, 1583년에는 스위스 교황사절이 되어 지역의 프로테스탄트를 상대로 설교하여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1584 11 3 밤에 밀라노에서 사망하여 주교좌성당 중앙 제대 아래 묻혔다. 그는 가톨릭 개혁 운동의 기수들 가운데 사람이자 학문과 예술의 수호자였다. 비록 그는 권력을 휘두를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항상 겸손하게 처신하고 성덕을 높임으로써 개혁의 반대자들로부터도 칭송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성직자나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들에게 권력을 남용한 적이 없다는 평을 들었다. 카롤루스 보로메오는 1602 5 12 교황 클레멘스 8(Clemens VIII) 의해 복자품에 올랐고, 1610 11 1 교황 바오로 5(Paulus V) 의하여 시성되었다. (출처 : 굿뉴스)